인간 세상 풍설 속 나그네, 남은 것은 가을빛뿐이네
처음에 사철성을 읽었을 때 나는 글 속의那句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모녀는 함께 있어, 잘 살자, 잘 살자…" 그때는 너무 어렸다. 열세 살, 열네 살 먹은 아이는 아직 인간 세상의 고통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다시 읽었을 때는 세월이 몸에 이미 약간의 어두운 흔적을 남겼고, 십여 년간 쌓인 슬픔과 아픔이 분출 직전의 침묵 속에서 천천히 글자 사이로 스며 나왔다.
나중에야 나는 그 말이 아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어머니가 운명의 차가운 돌판에 무릎 꿇고 마지막 숨을 다해 자기 아들을 대신해 인간 세상에 간청하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사람은 어찌 그렇게 처참하고 비참하게 살 수 있을까.
스물한 살, 사철성의 두 다리가 갑자기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세상은 얼굴을 바꾸었고, 그는 혼자 그 자리에 남겨졌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걷는 것을 보고, 가을 바람이 낙엽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것을 보고, 지탄의 오래된 담장이 황혼에 조금씩 썩어 가는 것을 보았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나이에, 그는 먼저 자신의 몸과 이별했다.
그런데 그는 그래도 살아 있었다. 그래도 글을 쓰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고통의 깊은 곳에서 거의 미약하지만 단단한 무언가를 더듬어 찾았다. 그것을 '살아갈 이유'라고 부른다. 이것은 오랫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생명, 운명이 마구 비틀어 놓은 생명이 도대체 무엇으로 그 길고 고요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밤을 견뎌냈을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 그를 지탱한 것은 바로 그 고통 자체였을 것이다.
고통과 후회는 무게가 있다.
그것은 기쁨처럼 가볍게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땅에 내려 뿌리를 내리고, 당신의 마음속에 구덩이를 판다. 깊이 팔수록 기초가 된다. 어릴 때는 이것을 몰랐다. 고난은 운명의 소홀함이고, 하늘의 실수이며, 자신에게 내려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다칠 때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하늘이 나에게 설명을 빚졌다고 생각했다.
차츰 깨달았다. 인생은 설명할 의무가 없고, 고난은 필연적이다. 모든 사람이 세상에 올 때, 그 행랑 깊숙이 이미 각자의 희노애락이 실려 있다. 어떤 이는 어려서부터 심연을 만나고, 어떤 이는 중년이 되어서야, 심지어 백발이 성성할 때에야 어떤 평범한 오후에 사소한 일에 맞아 갑자기 와해된다. 빠르고 늦음에 우열은 없다. 칼이 떨어질 때는 모두 살을 에는 아픔이다.
그리고 후회는? 후회는 고통보다 소화하기 어렵다. 고통은 자주 외부에서 오지만, 후회는 자신이 빚은 술이다. 입에 넣고 나면 자신의 오장육부를 태운다. 사람은 항상 이런 밤이 있다. 잘못 말한 한마디, 잘못 간 길, 붙잡지 않은 사람을 반복해서 되감는다.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돌아보게 된다. 마치 혀끝으로 썩은 이빨을 건드리는 것처럼, 아플수록 멈출 수 없다.
후회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끼게 한다. 사철성은 지탄에서 10년 동안 앉아 있었다. 그도 후회했다. 어머니에게 했던 냉담한 말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제대로 한 번 쳐다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 후회를 그는 감추지 않고 썼다. 너무 세밀하고, 너무 깊고, 너무 아프게 썼다. 마치 아직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이미 떠난 모든 사람에게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을 갚는 것처럼.
그리하여 후회는 글이 되었다. 글이 된 후에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상처만이 아니라, 어떤 공동의 것이 되었다. 인간이 서로를 알아보는 암호가 되었다.
당신이 그 글귀를 읽고 울었다. 자신을 위해, 자신의 후회로 가득한 밤낮을 위해 울었다.
그래서 나는 점차 깨달았다. 고통과 후회가 인생의 필연적인 길인 이유는 그것들이 고상하거나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아파본 적이 없다면 항상 가볍기 때문이다. 가벼운 사람은 한 방울의 눈물의 무게를 모르고, 한 사람이 깊은 밤에 벽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맛을 모르며, '버텨내다'라는 세 글자가 때로는 사람의 모든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모른다.
고통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고, 후회는 사람의 모서리를 갈아낸다. 그것들이 갈아내는 것은 예리함뿐만 아니라, 세상 물정 모르는 얕은 오만도 함께 갈아낸다. 진정한 상실을 겪고 나서야 가질 때는 조용히 말해야 함을 알고, '이해해'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입을 다물고 진지하게 들어야 함을 안다. 아무도 소중한 것을 바꿔서 이런 깨달음을 얻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잃었다면, 잃은 것이 무엇이라도 남기게 해야 한다.
사철성은 나중에 이렇게 썼다. 죽음은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일이며, 죽음은 반드시 찾아오는 축제일이라고. 나는 이 글귀를 읽고 갑자기 웃음이 나다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휠체어에 앉아 투석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사람이 죽음을 축제처럼 쓸 수 있다니. 그는 초탈한 것일까? 감히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고통을 철저히 살았다는 것이다. 철저히 살고 나면 사람에게는 기이한 평온이 찾아온다. 진정한, 체온이 느껴지는, 고요한 평온. 그것이 바로 고난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답이나 의미 같은 것은 없다. 어쩌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고, 단 하나의 고요한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너는 여기에 있다. 너는 그 풍설에 흠뻑 젖었고, 진흙 속에 빠졌고, 울고, 후회하고, 자신이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너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대답이다.
창밖에 어느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그 '우리 모녀는 함께 있어, 잘 살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혼란스럽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 말을 입에 머금었다. 마치 녹지 않는 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떫고, 삼키기 아까웠다.
인간 세상 풍설이 끝없이 휘몰아치고, 사람마다 모두 지나가는 나그네이다. 하지만 언제나 누군가 가장 추운 밤에 당신을 위해 한 등불을 지켜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우리 잘 살자.